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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사 김재계(金在桂, 1888~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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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
이용요금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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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없음

1938년 멸왜기도사건(滅倭祈禱事件)의 주모자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선생은 옥고로 인해 1942년 서울에서 52세의 나이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친 분이다 평생을 천도교를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민중의 교화와 민권의 신장에 헌신함은 물론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거룩한 분이다.

선생의 호는 성암(聲菴)이고,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에서 김규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익힌 뒤 15세에 천도교에 입문하였다. 17세때 손병희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으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홀로 3일간 단식을 한 뒤 청운의 꿈을 뒤로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6년 장흥군에 천도교당이 개설되자 천도교인이 되어 활동하면서 천도교 장흥교구의 발전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1919년 3.1운동이 선생은 독립운동 성금 오백원을 모금하여 거사를 지원하는 한편 그해 3월15일 김재반, 황생주, 황업주등 장흥의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장흥의 3.1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3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이후에도 줄곧 천도교 선교와 아울러 사회교화 운동에 신명을 바쳤다. 1932년 전남 대표로 천도교 중앙본부와 인연을 맺어 천도교의 재정을 관장하는 중책을 맡으므로서 천도교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1938년 멸왜기도사건(滅倭祈禱事件)의 주모자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선생은 옥고로 인해 1942년 서울에서 52세의 나이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친 분이다 평생을 천도교를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민중의 교화와 민권의 신장에 헌신함은 물론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거룩한 분이다.

최종업데이트
2024.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