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북면모산리 유혁선생동상제막식에 다녀와서
- 작성일
- 2011.11.23 23:35
- 등록자
- 서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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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산리에 피어난 독립지사의 꿈(1)
_ 우석(友石) 유혁(柳赫) 그는 누구인가?-
한국새사도교회 주교 서호련
월출산이 올려다 보이는 영암의 신북 모산리에 도착하여 “유인학 이원원 행사장이 어디인가요?”하고 어느 촌로에게 물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아천미술관이 있는데 거기예요.”라고 하였다. 도착하니 좌측엔 잘 지어진 현대식 미술관이 있고 우측엔 널따란 대형무대에서 사물놀이패들이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리 도착한 많은 관광버스와 승용차들, 그리고 하객들로 붐볐다.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산들과 앞쪽에 형성된 아늑한 마을. 잘 가꾸어진 소나무와 고풍스럽게 새로 지어진 십여 채의 한옥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명당의 지세였다. 이곳이 모산리 독립지사 유혁 선생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곧 국악공연이 펼쳐지고 경향각지에서 온 농민운동가, 헌정회 회원을 비롯한 전 현직 국회의원들, 인권변호사, 유림의 전교들, 그리고 문화관계 인사들이 좌정하였다.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 그리고 신호범 미국 워싱턴 주 상원의원을 비롯한 귀빈들이 넓은 잔디밭에 세워진 유혁 지사의 흉상에 덮인 하얀 천을 걷어내는 것으로 제막식은 시작되었다. 단상에 오른 전주 출신 이철승 전 국회부의장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꼿꼿한 자세와 품위 넘치는 논조로 정연한 즉석 축사를 했다. 그 모습에서 건국학생운동의 대표요 이 나라의 위대한 정치지도자 중 한 분이었음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전직 대법관의 축사 다음으로 신호범 의원의 축사가 이어졌다. 그 분은 현재 5선의 미국 워싱턴 주 상원의원으로 한국이 낳은 자랑스러운 미국 정치가이다. 이곳까지 어떻게 오셨는지 매우 놀라왔다. 모두 유혁 지사의 농민운동과 독립운동, 그리고 건국운동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고 6‧25 때 납북되어 북녘에서 세상을 뜬 한 많은 일생을 아쉬워했다. 축사를 끝낸 신호범 의원은 단상에서 내려오더니 맨땅에 무릎을 꿇고 유족인 유인학 총재를 향하여 절을 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버린 아버지를 원망만 했지 아버지에 대한 어떠한 효심도 나타내 본 적이 없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유 의원님이 존경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농민운동가요 독립운동가인 우석(友石) 유혁(柳赫), 일명 유용희는 누구인가?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던 분이다. 유인학 선배가 아버지 흉상제막식을 한다고 초청할 때만 해도, 무슨 일을 해서 흉상을 제막할까?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하고 조폐공사사장까지 하신 분이니 아버지를 위하여 효심을 발휘할 만도 하지, 그런 정도의 궁금증을 갖고 아내와 함께 영암에 갔었다.
유인학 의원은 고등학교 1년 선배지만 50년이 훨씬 지난날에야 그 분의 가문을 알게 되었다. 불세출의 포부를 가졌어도 후손이건 후학이건 누군가가 조명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강진 출신으로 광주고법 판사를 하다 서석법무법인 대표변호사로 있는 동기의 아버지도 6‧25 발발 전 평양시장을 했었다는 사실을 졸업한 지 수십 년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 친구도 연좌제로 법관 임명이 힘들었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유인학 의원이나 장조카 유수택 전 광주광역시 부시장 등 친인척들도 유혁 선생의 사상과 납북관계로 어려운 관직생활을 했을 것이다.
유혁 선생의 발자취를 들여다보니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가문부터도 그러하다. 제막식 식장에서 사회를 보던 장손자 유수택 전 시장이 내빈을 소개하면서 안동 유성룡의 장후손이 보낸 축전을 낭독할 때 나는 유혁 선생이 같은 ‘서애 가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식이 끝나고 아천미술관 안에 별도로 전시된 유혁 선생의 유품과 자료들에서 가문의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 왜 미술관의 이름을 아천(我泉)이라 했느냐고 유 선배에게 물었더니 깊게 교유하셨던 정인보 선생이 이곳 모산리에 정자를 세울 때 아천정(我泉亭)이라는 현판을 써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인보 선생은 우리나라 한문학의 대가요 국보급 역사학자다. 실학이란 학문의 이름도 그 분이 붙였고, 삼일절 노래도 그 분이 작사했다. 그러고 보니 ‘모산리’란 나만 모르고 있었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깊이 새겨진 마을이 아닌가?
제막식 팸플릿에 실린 유수택 시장이 쓴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혁 선생과 정인보 선생의 관계에 관한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 마지막으로 할아버님의 친구들과 관련된 글을 올리고자 합니다. 10여 년 전이나 되었을까요. 우연히 광주고등학교 제 2년 후배입니다만 2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단국대학교 이사장과 다산연구소장으로 있는 무안 출신 박석무 전 의원을 만났습니다. ‘유 선배! 역시 유 선배는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났소. 위당 정인보 선생 전집에 유 선배의 할아버지 글이 실려 있습디다. 스스로 양반이라고 안 해도 이젠 명문가문의 양반임이 틀림없이 증명됐습니다.’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그 길로 교보문고에 가서 위당 전집인 ‘담원 정인보 문록’ 전집을 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실린 ‘아천정기(我泉亭記)’를 촬영하여 유물관에 게첨하였습니다. 내용은 할아버지와 정인보 선생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모산리의 역사, 인물 등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특히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서체를 창안한 서예의 대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와 연려실 이긍익(燃藜室 李肯翊~ 1736~1806)과 더불어 모산리가 나주 일촌(一村)이요, 우리 유가들이 세거해 온 동네로 잘 소개되었습니다. 정인보 선생의 큰 자제분인 전 여수경찰서장을 지낸 정상모 씨를 우연한 기회에 남해종합개발주식회사 회장으로 있는 친구 김응서를 통하여 만나 뵙게 되었고, 인학 숙부께서는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둘째 아들인 정양모 씨와 대를 이어 세교하고 있습니다.”
기념관 안 벽면에는 유혁 선생의 유화로 된 초상화와 그 옆 유혁 선생의 매제인 유 의원 고모부의 초상화가 함께 걸려 있었다. 옆에서 유 의원이 “이 고모부는 광주학생운동의 주동자(고 정우채)인데, 할아버지가 그를 보니 똑똑해서 매제를 삼았더니 그도 감옥소에 들랑달랑하셨다.”라고 설명했다. 그 분들 초상화 옆에는 전주 강암 송성용 선생이 쓴 편액도 걸려 있었다. 옆에서 이철승 의원이 혼자 중얼거리셨다. ‘족탈불급(足脫不及)’이구만…….
우석은 1893년(고종30), 10월 16일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서 부친 유흥인(柳興仁)과 모친 거창신씨(居昌愼씨) 사이의 1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우석이 태어날 때 부친은 큰 용(龍)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기 때문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름도 용희(龍羲)라고 지었다. 우석의 부친 흥인은 나주 향교의 전교를 지낼 만큼 한학과 유교에 정통했다고 한다. 우석은 ‘문화 유씨’ 30세로 참판공파(參判公派)의 후손이다. 참판공파는 문화 유씨 17세인 유희정(柳希汀)을 파조(派組)로 하는데, 유희정은 여말 선초(麗末鮮初)의 명신이자 청백리로 유명한 하정(夏亭) 유관(柳寬)을 파조로 하는 하정공파의 현손(玄孫)이다. 그러므로 참판공파와 하정공파는 같은 집안이다.
우석의 집안은 부자(父子)정승으로도 유명하다. 하정의 10세손인 약재(約齋) 유상운(柳尙運)은 숙종조에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만암(晩菴) 유봉휘(柳鳳輝)는 영조조에 좌우정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그 뒤 중종조에 이르러 문화 유씨 17세인 유희정이 영암현감을 지내면서, 5남 유용강(柳用剛)을 경주이씨와 결혼 시켜 모산리에 거주하며 세거(世居)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신북면 모산리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문화유씨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우석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으며 가풍을 이어 받아 일찍부터 학문을 연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친 유흥인은 일제 강점기에도 집 울타리에 무궁화나무를 심었고, 아들과 관련되어 일본 경찰이 동태를 살피러 올 때면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망건을 쓴 모습으로 꼿꼿하게 앉아 있을 정도로 강단 있는 선비적 기품을 지녔다고 한다.
나는 얼마 전 남원의 사학재단 성원고 이사장으로 계시는 분에게 모산리 유혁 선생의 흉상제막식과 그 후손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유전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DNA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왕대밭에 왕대 나고 쑥대밭에 쑥대 난다는 것 아닙니까? 이사장님은 훌륭한 선친을 가지셨습니다. 아무나 사학을 일으키고 학교를 세웁니까? 이사장님도 선친의 DNA를 가지고 계십니다. 선고의 고귀한 뜻을 잘 이어가시기 바랍니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 1) (동상추모시를 쓴 소설가 문순태 님이 수택의 광주고 동기요 정인보 문집에 유혁 할아버지 일화가 나왔다고 알려준 다산 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이 2년 후배라 하니 유수택은 분명 나의 광주고 1년 후배다. 그러니 유인학(7회), 서호련(8회), 유수택(9회)은 각각 2년간을 나와 함께 한 교정에서 수학을 했던 것인데 나는 그날 수택과 인사도 못 나누었다.)
모산리에 피어난 독립지사의 꿈
- 유인학 의원의 아버지, 납북된 유혁(柳赫)--
월출산이 올려다 보이는 영암의 신북 모산리에 도착하여 “유인학 씨 행사장이 어디인가요?”하고 어느 촌로에게 물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아천미술관이 있는데 거기예요.”라고 하였다. 도착하니 좌측엔 잘 지어진 현대식 미술관이 있고 우측엔 널따란 대형무대에서 사물놀이패들이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관장엔 미리 도착한 관광버스와 승용차들, 그리고 하객들로 붐볐다.
멀리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산들과 앞쪽에 형성된 아늑한 마을. 잘 가꾸어진 소나무와 고풍스럽게 새로 지어진 십여 채의 한옥이 누가 보아도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명당의 지세였다. 이곳이 모산리 독립지사 유혁 선생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곧 국악공연이 펼쳐지고 경향각지에서 온 농민운동가, 헌정회 회원을 비롯한 전 현직 국회의원들, 인권변호사, 유림의 전교들, 그리고 문화관계 인사들이 좌정하였다.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 그리고 신호범 미국 워싱턴 주 상원의원을 비롯한 귀빈들이 넓은 잔디밭에 세워진 유혁 지사의 흉상에 덮인 하얀 천을 걷어내는 것으로 제막식은 시작되었다. 단상에 오른 전주 출신 이철승 전 국회부의장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꼿꼿한 자세와 품위 넘치는 논조로 정연한 즉석 축사를 했다. 그 모습에서 건국학생운동의 대표요 이 나라의 위대한 정치지도자 중 한 분이었음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한분의 전직 대법관의 축사 다음으로 신호범 의원의 축사가 이어졌다. 그 분은 현재 5선의 미국 워싱턴 주 상원의원으로 한국이 낳은 자랑스러운 미국 정치가이다. 이곳까지 어떻게 오셨는지 매우 놀라왔다. 모두가 유혁 지사의 농민운동과 독립운동, 그리고 건국운동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고 6‧25 때 납북되어 북녘에서 세상을 뜬 한 많은 일생을 아쉬워했다. 축사를 끝낸 신호범 의원은 단상에서 내려오더니 맨땅에 무릎을 꿇고 유족인 유인학 총재를 향하여 절을 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버린 아버지를 원망만 했지 아버지에 대한 어떠한 효심도 나타내 본 적이 없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유 의원님이 존경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농민운동가요 독립운동가인 우석(友石) 유혁(柳赫), 일명 유용희는 누구인가?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던 분이다. 유인학 선배가 아버지 흉상제막식을 한다고 초청할 때만 해도, 무슨 일을 해서 흉상을 제막할까?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하고 조폐공사사장까지 하신 분이니 아버지를 위하여 효심을 발휘할 만도 하지, 그런 정도의 궁금증을 갖고 아내와 함께 영암에 갔었다.
유인학 의원은 고등학교 1년 선배지만 50년이 훨씬 지난날에야 그 분의 가문을 알게 되었다. 불세출의 포부를 가졌어도 후손이건 후학이건 누군가가 조명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강진 출신으로 광주고법 판사를 하다 서석법무법인 대표변호사로 있는 동기의 아버지도 6‧25 발발 전 평양시장을 했었다는 사실을 졸업한 지 수십 년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 친구도 연좌제로 법관 임명이 힘들었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유인학 의원이나 장조카 유수택 전 광주광역시 부시장 등 친인척들도 유혁 선생의 사상과 납북관계로 어려운 관직생활을 했을 것이다.
유혁 선생의 발자취를 들여다보니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가문부터도 그러하다. 제막식 식장에서 사회를 보던 장손자 유수택 전 시장이 내빈을 소개하면서 안동 유성룡의 장후손이 보낸 축전을 낭독할 때 나는 유혁 선생이 같은 ‘서애 가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식이 끝나고 아천미술관 안에 별도로 전시된 유혁 선생의 유품과 자료들에서 가문의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 왜 미술관의 이름을 아천(我泉)이라 했느냐고 유 선배에게 물었더니 깊게 교유하셨던 정인보 선생이 이곳 모산리에 정자를 세울 때 아천정(我泉亭)이라는 현판을 써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인보 선생은 우리나라 한문학의 대가요 국보급 역사학자다. 실학이란 학문의 이름도 그 분이 붙였고, 삼일절 노래도 그 분이 작사했다. 그러고 보니 ‘모산리’란 나만 모르고 있었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깊이 새겨진 마을이 아닌가?
제막식 팸플릿에 실린 유수택 시장이 쓴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혁 선생과 정인보 선생의 관계에 관한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 마지막으로 할아버님의 친구들과 관련된 글을 올리고자 합니다. 10여 년 전이나 되었을까요. 우연히 광주고등학교 제 2년 후배입니다만 2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단국대학교 이사장과 다산연구소장으로 있는 무안 출신 박석무 전 의원을 만났습니다. ‘유 선배! 역시 유 선배는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났소. 위당 정인보 선생 전집에 유 선배의 할아버지 글이 실려 있습디다. 스스로 양반이라고 안 해도 이젠 명문가문의 양반임이 틀림없이 증명됐습니다.’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그 길로 교보문고에 가서 위당 전집인 ‘담원 정인보 문록’ 전집을 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실린 ‘아천정기(我泉亭記)’를 촬영하여 유물관에 게첨하였습니다. 내용은 할아버지와 정인보 선생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모산리의 역사, 인물 등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특히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서체를 창안한 서예의 대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와 연려실 이긍익(燃藜室 李肯翊~ 1736~1806)과 더불어 모산리가 나주 일촌(一村)이요, 우리 유가들이 세거해 온 동네로 잘 소개되었습니다. 정인보 선생의 큰 자제분인 전 여수경찰서장을 지낸 정상모 씨를 우연한 기회에 남해종합개발주식회사 회장으로 있는 친구 김응서를 통하여 만나 뵙게 되었고, 인학 숙부께서는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둘째 아들인 정양모 씨와 대를 이어 세교하고 있습니다.”
기념관 안 벽면에는 유혁 선생의 유화로 된 초상화와 그 옆 유혁 선생의 매제인 유 의원 고모부의 초상화가 함께 걸려 있었다. 옆에서 유 의원이 “이 고모부는 광주학생운동의 주동자(고 정우채)인데, 할아버지가 그를 보니 똑똑해서 매제를 삼았더니 그도 감옥소에 들랑달랑하셨다.”라고 설명했다. 그 분들 초상화 옆에는 전주 강암 송성용 선생이 쓴 편액도 걸려 있었다. 옆에서 이철승 의원이 혼자 중얼거리셨다. ‘족탈불급(足脫不及)’이구만…….
우석은 1893년(고종30), 10월 16일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서 부친 유흥인(柳興仁)과 모친 거창신씨(居昌愼씨) 사이의 1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우석이 태어날 때 부친은 큰 용(龍)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기 때문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름도 용희(龍羲)라고 지었다. 우석의 부친 흥인은 나주 향교의 전교를 지낼 만큼 한학과 유교에 정통했다고 한다. 우석은 ‘문화 유씨’ 30세로 참판공파(參判公派)의 후손이다. 참판공파는 문화 유씨 17세인 유희정(柳希汀)을 파조(派組)로 하는데, 유희정은 여말 선초(麗末鮮初)의 명신이자 청백리로 유명한 하정(夏亭) 유관(柳寬)을 파조로 하는 하정공파의 현손(玄孫)이다. 그러므로 참판공파와 하정공파는 같은 집안이다.
우석의 집안은 부자(父子)정승으로도 유명하다. 하정의 10세손인 약재(約齋) 유상운(柳尙運)은 숙종조에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만암(晩菴) 유봉휘(柳鳳輝)는 영조조에 좌우정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그 뒤 중종조에 이르러 문화 유씨 17세인 유희정이 영암현감을 지내면서, 5남 유용강(柳用剛)을 경주이씨와 결혼 시켜 모산리에 거주하며 세거(世居)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신북면 모산리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문화유씨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우석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으며 가풍을 이어 받아 일찍부터 학문을 연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친 유흥인은 일제 강점기에도 집 울타리에 무궁화나무를 심었고, 아들과 관련되어 일본 경찰이 동태를 살피러 올 때면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망건을 쓴 모습으로 꼿꼿하게 앉아 있을 정도로 강단 있는 선비적 기품을 지녔다고 한다.
나는 얼마 전 남원의 모 사학재단 이사장으로 계시는 분에게 모산리 유혁 선생의 흉상제막식과 그 후손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유전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DNA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왕대밭에 왕대 나고 쑥대밭에 쑥대 난다는 것 아닙니까? 이사장님은 훌륭한 선친을 가지셨습니다. 아무나 사학을 일으키고 학교를 세웁니까? 이사장님도 선친의 DNA를 가지고 계십니다. 선고의 고귀한 뜻을 잘 이어가시기 바랍니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 1) (동상추모시를 쓴 소설가 문순태 님이 수택의 광주고 동기요 정인보 문집에 유혁 할아버지 일화가 나왔다고 알려준 다산 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이 2년 후배라 하니 유수택은 분명 나의 광주고 1년 후배다. 그러니 유인학(7회), 서호련(8회), 유수택(9회)은 각각 2년간을 나와 함께 한 교정에서 수학을 했던 것인데 나는 그날 수택과 인사도 못 나누었다.)